<박희성목사의 아빠의 일기>‘사랑’이란 두 글자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아빠, 아빠ㅡ’하며 온갖 귀염을 토하던 아들이 이젠 40대 중반이 되었다. 그런데 중년이 된 지금도 머리가 하얀 나를 ‘아빠’라 부른다.

지난 6월 초, 나는 노인 티를 내느라 그런지 심장 핏줄 3개가 막혀 숨을 못 쉬어 아내의 손에 이끌려 응급실로 갔다가 갑자기 심장대수술을 받게 되었다. 코로나환자와 일반응급환자가 뒤엉켜 그야말로 콩볶듯 하는 때였기에 일체의 가족면회가 금지된 상태로 내가 사투를 벌이는 동안, 가족들은 심장을 정지시키고 대수술을 하는 고령의 나를 병원에 홀로 두고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수술 후, 재활치료 병실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아내의 전화를 받고- 나는 알았다. 느꼈다. 깨달았다. 아빠를 향한 아들의 애끓는 사랑을… 뼈가 녹아내렸다.

“엄마! 아빠 수술하러 병원안으로 들어가셨어”

“그래. 너는 어디야?” “병원 파킹장” “왜 거기 있어?” “그냥 ㅡ ”

“어서 집에 가. 밤새 잠도 못 잤을 텐데” “가야지ㅡ. 조금 더 있다가…”

새벽 5시, 내가 수술을 받으러 병원으로 들어간 후, 아들은 차마 발길이 안 떨어져 파킹장에서 한참을 그냥 있었다는 얘기다. 피가 거꾸로 솟는거 같았다. 오만가지 착잡한 심정으로 그 자리를 얼른 떠나지 못했으리라. 순간 나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기도는 얼마나 많이 했을까. 눈물은 얼마나 많이 흘렸을까. 가슴이 울컥거리면서 울음이 북받친다. 평상시 아들과 깊은 감정을 나누지 못함을 후회하며 아들과 커다란 감정과 사랑의 통로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동안 아들이 점점 커가면서 무뚝뚝하고 말도 제대로 안 해서 서운하기도 하고 멀게 느껴지기도 하여 아내에게 “왜 애 교육을 그렇게 시켰느냐, 아빠라 부르게 하니까 아버지인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 법”이라고 화풀이를 자주 했었다. 그런데 아내의 말이 옳았다. 호칭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감정이 무딘 편이고 덤덤해서 애정표현도 없고, 적시에 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지 못하고 살았다. 스파크가 일어나는 가족간의 사랑표현은 물론, 손을 잡는 최소한의 스킨십도 안하고 산 것 같다. 오죽하면 아들이 한국에 사는 아가씨와 사귀게 되어 결혼식을 한국에서 하게 되었는데 학교일이 바빠서 안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었다. 단지 흐트러짐 없이 책속에 묻혀 평생 공부하고 학자로서 학교일에 몰두하고 살면서 내심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어이없는 아빠였다.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걸 빼먹고 구멍 뚫린 삶을 살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가족에게 너무나 무관심했고 가정에 너무나 소홀했다. 형제도 없는 아들이 그간 얼마나 외롭고 슬펐을까. 아마도 병실침대에 누워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나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던 그대로 덤덤하게 무딘 감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았을 것이다.

미안하다. 아들아! 어릴땐 함께 하지 못하고 외롭게 자라게 해서 미안하고, 학창시절엔 야단치며 이해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결혼 때는 한 주간 아빠랑 단 둘이 여행 한번 하고 싶다던 너의 말을 밀쳐내서 미안하고, 최근 몇 년은 좌파우파 동영상에 빠져 오랫동안 속상하게 해서 미안하다. 이제는 가정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아빠가 될게.

“아들아! 사랑한다, 아들아 사랑한다” 나는 재활원 침대에 누워 수십 번 아들을 불렀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아빠를 살려줘서 고맙고 믿음직스럽다. 주님 곁으로 가는 날엔 침상에서 너의 손을 따듯이 잡고 ‘아들아 사랑한다’라고 축복하면서 세상을 떠나고 싶다.

10 views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