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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성목사의 사람사는 이야기> ‘마지막 주자’



어느 경기든지 선수들은 그 경기의 꽃이다. 관중들은 선수들을 위해 존재하고 선수들은 관중들에게 자기 나라의 ‘주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게 서로의 룰이다. 관중도 선수도 이런 룰을 잘 지킨 역대급 경기가 있었다.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아쿠아리 마라톤 선수가 다리에 붕대를 감고 절룩거리며 들어올 때 멕시코 마라톤경기장에 모인 청중들은 모두 기립하여 정중하게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지금도 세계 스포즈계를 밝게 빛내고 있다.

경기 도중에 무릎을 다친 그 선수는 붕대를 감고 다리를 절면서 4시간이나 걸려 전 코스를 완주한 것이다. “내 조국은 나에게 경기를 시작하라고 여기에 보낸 것이 아니라 끝까지 경기를 마치라고 여기에 보냈습니다”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나간 그의 인터뷰도 유명하다. 그는 올림픽 경기의 ‘마지막 주자’로서의 사명과 정신을 일깨워준 영웅이 되었다.

몇 년 전, 성결대학 강사로 일하며 학교인근 범계역 근처에서 잠시 살던 때의 일이다. 아파트 바로 앞에 킴스클럽이 있어 이미 번화한 곳인데 그 옆에 대형 롯데백화점까지 들어서는 바람에 일명 문화광장이 조성되었다. 그런데 한 달도 못되어 그 광장이 시커멓게 껌딱지가 난무하고 공연장소의 객석으로 둥글게 만들어 놓은 계단에 종이와 비닐봉투들이 쌓여 볼썽사나웠다. 관리를 누가 하는가 알아보니 구청과 백화점이 서로 떠넘기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광장이며 그 좋은 문화혜택을 누릴 자격이 없는 주민들이 한심했다.

구청을 찾아갔다. 이 한심한 처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구청장과 청소과장이 잘 처리하겠다고 약속을 해서 돌아와 지켜보았다. 정말로 바닥에 붙은 껌딱지를 긁어내고 굴러다니는 휴지가 없어졌다. 공연이 있든 없든 공연장 객석계단에 끼리끼리 담소를 즐기는 광경이 아름다웠다. 하면 되는 거였다. 할 수 있었다. 문화공간의 ‘마지막 주자’는 그곳을 즐기고 왕래하는 주민들이다. 비단 거리뿐인가. 광장뿐인가. 곳곳마다, 일터마다, 교회나 나라에도 ‘마지막 주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 중요한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일의 성패가 갈린다.

얼마 전부터 나는 하나님 나라에 ‘마지막 주자’의 사명을 완주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나이가 있으니 날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임한다. 몸은 예전과 비교도 안 되게 허약해졌고, 1등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최선을 다하는 ‘마지막 주자’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동안의 잘못을 사과도 하고, 회개도 하고, 평생 안하던 설거지도 가끔 한다. 베풀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했던 후회를 원고로 써서 남기기도 하고, 인터넷학교 성경교재를 쓰기도 하면서 마지막 주자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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