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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의 초록이야기> K의 디지털 노마드 인생



중학교 때 내 친구 K는 책벌레다. 책을 읽다 흥분하면 손톱을 물어뜯었다. 물론 내가 모르는 무슨 욕구불만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 어린 내가 본 K는 유난히 손톱이 엉망인 날에는 읽고 있는 책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K와 나는 삼중당문고 책을 주로 읽었다. 포켓 사이즈였고 가격이 만만해서다. 이왕이면 쪽수가 많은 두꺼운 책을 골랐다. 두꺼운 책을 사야 오래 읽고 좋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책도 밥을 먹듯 무턱대고 그냥 읽었다.

K는 자기의 소원이 부자가 되는 거란다. 엄청 부자가 되는 거란다. 평생 돈 안 벌어도 되는 부자로 살고 싶다했다. 여행 다니며 책만 읽으며 살고 싶다했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은데 돈도 벌어야 하면 책은 언제 읽느냐며 살짝 눈물까지 흘렸다. 그렇지~ 세상에 있는 책 다 읽으려면 책만 봐도 시간이 모자라지~ 늘 여행 다니려면 어디 소속되어 있으면 곤란하지~~.

중년이 된 지금, 그 친구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여전히 책을 좋아하겠지. 소원을 이루어 책만 봐도 되는 부자면 좋겠다. ‘디지털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으면 좋겠다. 손바닥 만한 첨단 기기 하나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읽고 싶은 책 맘껏 읽으며 살고 있으면 좋겠다.

​몇 년 전 도서관에서 ‘시’수업을 들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다 외우시죠?” “네-” “외워보세요-”

강사 앞자리에 앉은 내가 딱 걸렸다. 외우고 나서 나중에 보니 ‘시’ 한 줄을 홀랑 빼먹고 외웠다. 그 ‘서시’는 K와 같이 외웠던 시다. 그날 ‘시’수업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K가 울었던 사연을 이야기하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은 외롭고 괴로웠나보다. 시인의 마음은 아름다웠나 보다. 시인은 나라를 빼앗긴 현실에서 마음의 자책감이 들었나보다. ‘시’수업은 좋았다. 소중한 것을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오랜만에 꺼내보며 좋아라했던 마음이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유학에 필요한 여권을 발급 받기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그때 쓴 시가 ‘참회록’이다. 윤동주 시인이 창씨개명 한 일을 친일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강사는 답답해했다. 오늘은 영화 ‘동주’를 다시 보며 ‘서시’를 함께 외우던 친구 K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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