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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희의 살며 생각하며> 늙은 레몬나무를 보며 

Updated: Dec 28, 2023


“어머, 열매와 꽃이 함께 매달렸네” 오랜만에 우리집을 방문한 친구가 뒷마당 정원에 있는 레몬나무를 보며 한 말이다. 겨울이 없는 푸근한 캘리포니아의 정원에서 처음으로 한 나무에서 열매와 꽃을 동시에 본다는 친구의 말은 내 마음의 씨앗인양 기쁨을 심어주었다. 열매라고 지칭한 것은 주렁주렁 레몬을 달고 있는 크고 못생긴 레몬나무를 말함이었고, 노랗게 익어가는 레몬나무의 자연의 한쪽에서는 순리대로 레몬꽃을 피워낸 것이었다.

작은 리본처럼 돋아나는 연록색의 이파리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빨리 개화한 것은 빨리 지게 마련이라는 생각 하나를 줍는다. 나무는 저마다 꽃이 피는 시기가 같지 않다. 목련처럼 일찍 피어나는 꽃이 있는가하면, 장미처럼 늦게까지 잠들어 있는 꽃도 있다. 빨리 피고 늦게 피는 것이 무슨 우열이 있겠는가. 기후조건에 따라 일찍 개화하는 생리를 가진 나무가 있는가하면, 늦게 개화하는 나무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저마다 다른 나무들의 속성에 어떤 우열의 기준을 적용시킬 수는 없기에, 우리는 목련과 장미의 꽃피는 시기를 놓고 우성과 열성을 논하지 않는다. 다만 일찍 핀 것은 일찍 지게 마련이고, 늦게 핀 것은 늦게까지 그 꽃을 볼 수 있다는 시간적 순차가 있을 뿐이다.

 

사람도 일찍 출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늦게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도 있다. 나무가 저마다 자연에 적응하는 생리가 다르듯이, 사람도 자기완성의 시기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도정에서 볼 때, 일찍 자기완성을 이룬 사람과 늦게 이루는 사람 사이의 차이란 그다지 대수로운 일은 아닐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언제 그 완성의 정점을 이루었는가 하는 시기가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진지하게 그 완성을 향해 노력해 왔느냐의 자세일 것이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을 달고 있는 나무가 없듯이, 사람도 완성의 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앞서가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보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한걸음 한걸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자연의 현상이란 아름다우면서도 엄숙한 것이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의 “난 이제 고목이다”하시던 그 눈길에는 귀로에 접어든 나그네의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늙은 레몬나무처럼. 그렇지만 어머니의 눈에 생기가 돌고 유연의 빛살이 퍼지는 것은 손주들의 모습을 바라보실 때였다. 제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손주들이 당신 등걸에서 돋아나는 새순임을 알아 대견해 하셨다.

사람들도 겸손한 마음으로 순리에 따른다면, 앞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 조급증을 댈 필요도 없고, 낙화처럼 물러가야 하는 계절이 온다해도 추하지 않게 양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빠름과 늦음의 차이는 꽃잎 하나가 달려있고 떨어지는 그 이상의 무슨 의미가 더 있겠는가. 한해가 저무는 12월 끝자락에서서 그냥 쓸어버리기 아까워 모아두었던 나뭇잎들을 버리면서, 자연의 질서란 거역할 수 없는 순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시인, 수필가, LA거주, ‘작가의 집’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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