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감자떡

Updated: Apr 5


태어나고 자라난 곳을 떠나면 어디에 살고 있든 관계없이 모태로 돌아가고 싶은 회귀본능과 더불어 자랄 때 먹던 음식이 불현듯 생각난다. ‘강원도’ 하면 뒷말엔 꼭 ‘감자바위’가 붙는다. 강원도가 고향이기 때문인지, 감자를 좋아하기 때문인지, 감자는 장바구니 속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할머니께서는 고향에서 가마니에 가득 담아온 감자를 펼쳐 놓으시고 앞마당에 너르게 앉아 대소쿠리에 상처 나고 못생긴 감자를 골라 뒤뜰에 있는 항아리에 넣으셨다. 하루, 이틀, 사흘 한참을 지나면 감자 썩는 지독한 코린내가 온 집안에 가득했지만 감히 할머니 앞에 누구도 고약한 냄새를 불평할 수는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썩은 냄새가 완전히 사라지고 애기주먹만큼 큼직큼직한 볼품없는 투명한 감자떡이 탄생된다. 달콤한 팥 앙고와 쫄깃쫄깃한 감자의 맛이 어우러진 일품 감자떡과 알맞게 익은 나박김치를 곁들여 먹는 맛은 최고의 간식이었다.

어떤 수고와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고 고약한 냄새도 싫었지만 어릴적 우리는 일 년에 몇번씩 해주시는 할머니의 감자떡을 은근히 기다렸다. 세월이 지나 나 또한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할머니의 그 감자떡 맛은 언제나 먹거리 풍부한 미국땅이건만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그리운 맛이다.


내 가슴속에 있는 그리운 우리 할머니와 나의 일곱 손자들이 나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이미지는 다를 것이다. 물론 사랑의 방법도 비교 할 수는 없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네 명의 손자들을 키울 때였다. 아침 7시부터 차례로 도착한 손주들을 프리스쿨 선생을 오래 했던 나는 그 방법으로 시간표를 만들고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재웠다. 손자 넷을 키운다는 입소문을 듣고 한인타운에 있는 모 일간지 신문기자가 우리 집을 탐방하여 기사를 쓰겠다고 찾아왔다.


‘내 분신을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없어서-’ 라는 제목으로 ‘가정’난 전면에 사진과 함께 특집으로 실렸다.

그 기사가 나간 후 손자들을 키워줘야 할까 말까 하는 할머니들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했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한일은 손자들을 키워준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아이들이 커서 금년에 두 아이는 대학을 가고, 다른 두 아이들도 내후년이면 대학을 간다. 손자들과 함께 보냈던 몇 년의 시간들이 나의 할머니처럼 인생길에 많은 추억을 남겨주는 할머니였으면 좋겠다.


언젠가 미중서부여행 중 햇살에 눈이 부신 듯 낮게 엎드린 짙푸른 잎 속에 없는 듯 조용히 숨어 피어 있는 흰 감자 꽃을 가만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순간,정갈하고 단아하셨던 할머니 모습이 스쳐갔다. 삼강오륜을 가르치셨고 깊은 신앙의 근원을 바탕으로 인간의도리와 여자의 인생을 말씀하시던 한 말씀 한 말씀은 감자가루에 흘러내리던 할머니의 눈물처럼 내 가슴에 흘렀다.


어느 땐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딸에게, 며느리에게, 손녀들에게 답습하고 있을 때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감자가 잘 썩어주기를 기다려 녹아내릴 녹말을 고대하며 자식들 먹일 일념으로 씻어내고 또 씻어낸 후, 햇살에 깨끗하게 말린 감자가루로 떡을 만들어 주셨던 우리할머니! 층층시하 엄한 대가 집 가풍의 안주인 자리가 결코 녹록치 않으셨으리라.


가끔은 눈시울을 붉히시며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명석한 머리에 바이올린을 잘했다는 작은 아들과 이북으로 납치당한 작은 딸과 사위를 늘 가슴에 묻고 못 잊어 하셨다. 감자가 썩어 껍데기만 남기고 가루가 되는 그긴 시간동안 할머니의 아픈 가슴에 흐르는 눈물도 감자가루 속에 녹아내렸을 것이다. 할머니는 뼈아픈 인고의세월을 내색 없이 온화함으로 묵묵히 이겨내시며 신앙의 불을 밝혀 자식들을 환하게 비쳐 주셨다.


엄동설한 추운 겨울, 학교 갔다 돌아오면 아랫목을 파고드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시며 성경을 읽으시던 돋보기를 벗으시고 얼른 발을 두 손으로 녹여주시던 할머니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이삭과야곱 이야기를 화두로 성경속 인물들을 줄줄이 역으셔서 동화처럼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오늘은 성경책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날이다. 감자떡도 먹고 싶지만 높고 깊은 할머니의 사랑이 무척이나 그리운 날이다.


  - 이승희(LA 펜문학 회장)

  - 원더풀라이프 12월호 중에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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