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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의 초록이야기> 울할아버지


양복에 코트를 멋지게 입으신 할아버지와 한복에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입으신 할머니가 내 초등학교 입학식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집으로 오면서 할아버지는 내게 인생좌표를 알려주셨다. “너는 어제까지는 동물이었는데 이제 학교에 다니며 글을 배우게 되었으니 오늘부터는 사람이 된 거다. 글을 배우고 배운 글로 책을 읽는다는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책이 사람을 만들어 주는 거란다. 책을 많이 읽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3월 입학시즌이면 가끔 할아버지가 해주시던 이 말씀이 생각난다. 어린 나는 그때 사람이 글을 배운다는 게 굉장한 의미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열심히 책을 읽었고, 내 삶에는 늘 곁에 책이 있었다. 책속은 늘 평안했다. 첫째- 멋진 사람다움, 둘째- 내가 하기 싫은 건 남도하기 싫은 법, 셋째- 말습관 알아채기 등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말씀들이 실제로 책속에 모두 들어있었다.

어릴 적, 오빠들은 자기 몫의 할 일을 나에게 떠넘기기 선수였다. 한 번은 나도 이번만은 안 되겠다싶어 아래 동생에게 시켰다. 지켜보시던 할아버지께서 우리들을 부르셨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도 하기 싫은 법이다. 그러니 내 몫이라 생각하는 건 스스로 하고, 같이 해야 하는 일은 남보다 조금 더 알아서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늘 할아버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결혼 후 우리 아이들에게도 뭐든 스스로 하라고 가르쳤다.

한 번은 아들이 이런 습관 때문에 가끔은 손해를 본다고 푸념을 했다. 그때 나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전에 회사에서 디자이너를 뽑는데 예상합격자를 제치고 의외의 사람이 최종 합격된 사례였다. 그 사람은 시험을 치르고 나서 주변을 정리하고 휴지에 지우개 가루까지 싸서 나온 사람이었다. 회사는 실력보다 사람 됨됨이를 본 것이다.

‘우리는 평생 부부 싸움 한 번 안해 봤어요’ ‘우리아이는 혼날 일을 한 적이 없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속으로 ‘뻔한 거짓말’이라 응수한다. 오빠들 틈에서 선머슴 같이 놀던 나에게 할머니는 “너는 어째 흙을 안 묻혀 오는 날이 없냐”고 하시면 나는 속으로 ‘아닌데- 흙 안 묻힐 때가 더 많은데-’라고 대든다.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할머니는 맨날맨날 거짓말만 하신다”고 일러바친다. 할아버지는 “언제 할머니가 맨날맨날 거짓말을 했어? 거짓말 안 하는 날이 더 많은데-”라 하셨다. 히히 맞다.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말습관이 이런 거였다. 사람마다 말습관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툭 튀어나오는 말이니 그냥 알아채면 된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말습관 알아채기’에 종종 실패할 때가 있다. ‘욱’하다가 뒤늦게 ‘그렇구나’ 알게 된다. 내공이 필요하다.

역시 나의 좋은 스승, 인생 안내자였던 우리 할아버지! 얼마 전 미국에 사시는 고모가 할아버지 꿈을 꾸셨다고 전화가 왔다. 우리는 전화통을 붙들고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한바탕 울었다. 참 그립다. 울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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