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라면을 처음 맛본 것은 아르바이트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때, 학생 혜경이네 집에서였다. 어느 날, 혜경이가 퉁퉁 불어터진 라면을 끓여주며 “엄마가 외출하시며 선생님 오시면 드리라고 했어요”라 했다. “너, 라면도 끓일 줄 알아?” 대단한 요리를 해낸 것 같은 표정의 중2짜리 혜경이와 나는 동시에 깔깔 웃었다.
그리고 햇병아리 교사로 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국에서 ‘한글전용운동’을 장려하는 의견을 모집한다고 하여 나는 국어선생의 사명감도 발동하고, 평상시 느꼈던 바도 있어 정성스럽게 엽서로 의견을 보냈다. 예상대로 1등으로 채택되었고, 상품으로 라면 2 박스가 배달되었다. 초창기 라면시대에 나는 부자가 된 듯 좋았다.
결혼 후, 남편과 태국선교사로 가서 사는데 자동차가 필요하여 한국으로 예금한 돈을 찾으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은행에 들어서서 출금용지를 쓰려다 깜짝 놀랐다. 동양방송국 ‘한글전용운동’ 모집 때 내가 냈던 내 아이디어대로 입출금 전표가 일, 이, 삼 등 모두 한글로 쓰도록 변해있었다. 갑자기 온몸에 찌르르 전율이 왔다. 당시엔 모든 숫자를 어려운 한문으로 써서 은행문턱이 높다고 불만들이었는데 ‘한글숫자’를 쓰도록 변하다니 꿈만 같았다.
은행뿐 아니라 관공서의 모든 서류들까지 한문숫자대신 한글을 쓰는 대변신 ‘한글전용시대’로의 혁신을 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대한민국 행정상의 역사적 한 획을 그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이런 귀한 일을 한 나에게 표창장 하나쯤 안겨줬어야 맞다는 생각은 5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남미선교사로 브라질에서 살 때는 남편의 신학동창생 박재호 목사가 일본 이삐방라면을 미국에서 박스째 공수해 와서 자랑하며 자주 드셨다. 외국엔 한국 라면이 없던 그때, 나는 동양방송국에서 상품으로 받은 한국라면 2박스 얘기를 침이 마르도록 그분에게 하면서 “우리 라면, 맛있는 라면”을 외치며 그놈의 일본 이찌방라면을 눌러 이기곤 했다.
그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한국 라면은 하얀국물, 빨간국물, 짜장라면, 비빔라면, 컵라면 등 라면의 진화를 거듭하며 세계 각국으로 퍼졌고, 소비자들도 갖가지 끓이는 방법을 개발하여 낙지나 꽃게가 통째로 들어가기도 하며 짜파구리니 뽀글이니 명칭도 현대화로 변천해갔다. 특히 면 위에 다양한 토핑을 얹어 먹는 것이 SNS나 영화를 타고 전세계로 퍼져 바야흐로 이제는 K라면 시대가 되었다.
며칠 전 손주들과 외식을 하고 집에 들어오니 칼칼한 라면 생각이 났다. 얼른 가까운 한인마켓에 갔는데 종류가 엄청 많아 또다시 놀랐다. 나는 그 옛날 상품으로 받은 라면이 떠올라 눈에 가장 익숙한 라면을 골라들고 가장 정통방식으로 끓여먹어야겠다 생각하며 마켓을 나섰다. <원더풀라이프 발행인 박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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