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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Aging-아름답게 나이먹자> 졸업 


브라질에 선교사로 가서 이민목회를 할 때, 여름방학 때마다 개최한 2주간의 ‘계절학교’는 어린이들 한국말이 연세대학 한국어학당을 능가한다는 소문과 함께 쌍파울 교회들이 거의 따라했던 행사였다. 아침 9시, 교회마당에서 애국가로 시작, 저녁 6시까지 각 교실로 들어가 브라질 말인 포르투칼어는 한마디도 못하게 하고 강행했던 한국말교육! 다함께 모여 찬양과 율동과 한국동요로 단결했던 축제같던 종례시간!

선생님들은 스스로 휴가를 냈고, 점심 저녁 간식은 항상 최상급, 하루 한번이상 한국말 전화하기 등 나의 전략은 통했다. “엄마 바꿔주세요”라는 선생님의 전화에 생전처음 한국말로 전화를 해야 하는 아이의 “내꺼 엄마 가져올게”라던 엉겁결 대답은 어른들을 폭소케 했었다.

졸업식은 한편의 영화였다. 대학생처럼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교장에게 긴 둥근통에 담긴 졸업장을 받고, 담임선생님에게 꽃다발을 받고, 15명의 선생님들에게 나란히 악수와 허그를 받으면서 -안녕 친구여, 만날 때까지 주님 품안에- 졸업가를 부르며 퇴장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 삽시간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부형들과 교사들과 아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 끌어안고 치른 눈물의 졸업식은 정말로 역대급이었다.


아들의 졸업은 가슴 아픈 졸업식이었다. 한국, 태국, 브라질, 미국 4개국을 전전하며 프리스쿨과 킨더와 초등학교를 다녀야했던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은 아빠의 선교지가 바뀔 때마다 나라를 건너뛰고, 학년을 건너뛰고, 친구와 국제적으로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해서 미국에 와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4학년을 다니다가 5학년은 건너뛰고 6학년은 겨우 2달을 다니고 나이에 맞춰 5월 졸업을 해야 했다. 기초실력도 없고, 친구도 없이 힘들게 공부를 해야 했던 내 아들에게 그래서 나는 평생 죄인엄마였다.

어린 아들의 아픔을 만져줄 틈도 없이 나는 유학생이 된 남편의 학부형과 가장노릇을 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연중무휴 바쁘게 뛰었다. 그렇게 10여년, 드디어 남편의 졸업식을 맞은 나는 고생끝, 행복시작인가 했고, 부푼 가슴으로 450sf 큰방에 원서들로 가득채운 고급책꽂이들, 대형책상, 회전가죽의자 등 영화에서나 보던 호화서재를 꾸며 졸업선물을 했다. 책상을 사면서는 생애 마지막 책상 같아서 왈칵 눈물이 났다. 깜짝 놀란 미국직원이 “너는 행복한 남편”이라며 남편의 손을 잡고 친구처럼 좋아했다.

 

내 졸업식 추억은 지칠 때마다 미소의 묘약이곤 했다. 특히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은사님들께 감사인사를 하던 대학사은회날 “사회에 나가면 돈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라”시던 은사님의 말씀이 가슴에 닿았었는데 그간 ‘돈을 잘 쓰며 잘 살았다’는 보람, 자부심 그리고 내게도 젊고 푸릇했던 젊음이 있었다는 생각에 고생했던건 잊고 몽글몽글 미소와 힘이 피어났었다.

그런데 이제 어느덧 인생의 졸업시즌이 되었다. 그동안 “졸업은 시작이다 사회에 이바지하라” 수없이 했던 말들이 덧없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헛되고 헛되도다의 한탄은 싫다. 그저 최선을 다하며 살았으니 그것으로 “행복했다”라 말하고 싶다. 다만 남은 날들은 해 아래가 아닌, 해 위에서의 삶을 잘 준비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원더풀라이프 발행인 박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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