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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being으로 살기> 하늘보다 더 큰 눈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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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브라질로 전학할 때의 일이다. 나는 아이들의 선물로 책받침을 준비하고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여 아들의 초등학교, 당시의 독립문국민학교로 들어섰다. 사실 4살 어린 아들을 태국으로 데리고 가면서 너무 이른 나이에 이별의 눈물을 흘리게 했기에 이번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이별은 좀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교실에 들어서니 ‘박솔로몬 브라질행’이라는 큰글씨가 칠판에 쓰여 있고, 아이들은 책상에 엎드려 훌쩍거리고, 선생님은 창문너머 먼 하늘을 응시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계셨다. 이미 교실은 이별의 시간이었고 그 분위기는 다음 공부시간을 빼먹고 교무실앞 계단에 나란히 앉아 단체사진을 찍기까지 계속 되었다.

사진을 찍고 오후 수업종이 울릴 때 “누가 방구꿨어?” 선생님이 농담을 하셨고, ‘까르르’ 아이들이 웃음으로 답하며 일단 눈물바람은 끝이 났다. 이별은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태국선교사로 떠나면서 한국의 추억을 만들어 주려던 나의 발상은 병아리반의 노랑모자, 노랑가방, 노랑점퍼, 노란스쿨버스의 추억은커녕 태국, 한국, 브라질, 미국을 돌고 돌면서 아들은 가슴이 아프다며 친구들에게 답장도 못할 정도로 슬퍼했고 나는 죄인엄마로 살았다.

 

내 조카 쪼잉과의 이별도 역대급이었다. 아장아장 걷던 2살 나이에 엄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쪼잉이는 말문이 막혔는지 까만 속눈썹을 깜빡이면서 하루 종일 말없이 지냈다. 그후 1년 만에 겨우 다시 입을 떼기 시작한 쪼잉이의 첫 마디는 “오모ㅡ”였다. 엄마와 고모의 중간쯤 어딘가를 조그만 입에서 헤매는 것 같았다. 고모인 나를 찾는 쪼잉이를 나는 으스러지게 안아주며 찢어지는 가슴으로 그때부터 쪼잉이와 조카들을 안고 업고 키웠다.

그런데 쪼잉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한가득 눈물 고인 날이 또 닥쳤다. 신부입장을 하려던 내 결혼식장에 5살 쪼잉이가 “오모ㅡ”를 부르며 나타난 거였다. 그후 초등학교 5학년, 또다시 눈물바람을 하게 된 쪼잉이. 태국선교사로 우리가 한국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쪼잉이를 가운데 두고 왕고집 오빠와 쪼잉이를 데리고 떠나려 씨름을 했다. 그러나 결국 포기, 그때부터 태국 한국 브라질 미국을 전전하며 날마다 쪼잉이가 그리워 울며 지냈다.

 

“고모! 아이들의 이별눈물방울이 얼마나 큰줄 알아? 하늘보다 더 커서 하늘이 안보여” 한국에서 중년이 된 쪼잉이와 만난 어느 날, 손녀 희주를 보고 싶어 하는 내게 쪼잉이는 어릴적 자신이 고모인 나와 작별하던 때의 심정을 얼떨결에 토했다. 나는 난생 처음 듣는 상상불가의 큰 눈물방울 얘기에 가슴이 오그라들고 갈라지는 아픔에 떨었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어린 쪼잉이의 하늘보다 큰 눈물방울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하는 조카 쪼잉이 앞에서 나는 이미 너무 큰 죄인이었다.

엊그제 우연히 안양시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가 전학을 하면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울면서 송별노래를 부르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삽시간에 SNS 87만 펜들과 750만 댓글로 난리였다. 왜일까? 탁한 세상에서 어린아이들의 이별눈물이 ‘맑은 울림’이었을 게다. 나도 아들의 송별눈물, 조카 쪼잉과의 이별눈물과 겹쳐져서 한참 힘이 들었다. <원더풀라이프 발행인 박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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