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오후 정희는 두 팔을 벌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손바닥으로 받아본다. 그때 갑자기 넓은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정희는 권중이가 와 있다는 걸 직감한다. 미소를 머금은 정희의 손에 낙엽대신 권중이의 손이 올라왔다. 권중이와 정희는 오랜 친구다. 한마을에서 자란 코흘리게 친구로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닌 막역한 사이다.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쳤다. 20여년 만이다.
가을을 유난히 좋아하는 정희는 그때도 스산한 가을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천천히 걷고 있었고, 권중이는 아무 생각 없이 무덤덤하게 골목길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둘은 동시에 ‘닮았다’라는 생각이 스쳤고, 동시에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 너~” “너~~” 하면서 20여년만의 재회를 이뤘다.
아이처럼 깡총깡총 웃음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끌어안고 얼마나 뛰었던지. 그후 둘은 날마다 만났고 밀린 얘기는 끝도 한도 없었다. 권중이는 어릴 때 정희를 평생 지켜주겠다고 다짐을 했었지만 성격대로 무덤덤 기억조차 없는데, 정희는 권중이의 그때 약속이 지금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노심초사다. 그러나 시종 내숭을 떠는 정희와 감도 못잡는 권중이다.
둘은 서로 미혼이라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20년의 세월만큼이나 긴 추억속에 갇혀서 과거의 주변만 맴돈다. 정희는 매사에 ‘허허’로 대신하는 헐렁한 권중이가 답답하다. 그래서 오늘은 작정하고 권중이와 희망을 노래하며 뛰놀던 기억들을 들췄다. “그때 우리집 앞 연못에서 배를 타며 연뿌리도 캐먹고 연밥도 따먹고 물에 동동 뜬 연꽃의 자태를 감상했었지?” 정희는 이미 추억속에 깊이 빠져버렸다.
“참, 너는 학교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잖니?” 권중이도 침묵을 깨고 말을 걸었다. 심지어 나도 잊고 잊던 나의 장래 희망까지 기억하는 권중이에게 정희는 묘한 감정이 발동해 권중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때는 재잘재잘 낙엽만 굴러가도 웃고 떠들던 시절이었어” 정희는 추억을 얘기하며 현실의 권중이를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적막을 깨고 권중이가 진지하게 말을 걸어 왔다. “정희야, 너하고 이렇게 극적으로 다시 만날 줄을 정말 몰랐다. 인연일까?” “권중아, 나도 이렇게 우리가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 우리 인연인가봐” 가을낙엽이 축복의 음악처럼 발밑에서 으스슥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둘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그림을 연출하며 내일을 약속한다.
“마침 Thanksgiving Day가 다음 주니까 그날을 우리의 D-day로 정하고 우리교회로 가서 인사드리자” 권중이의 정중한 청원에 정희는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인다. 어릴 때도 친구들을 교회로 몰고 다니던 우직한 권중이는 정희와의 첫발을 교회서부터 시작하고 싶은 속셈이고, 정희는 권중이의 변함없는 신앙과 듬직함이 좋다. 늦가을 찬바람에 낙엽이 어석 서리를 내며 축복의 협주곡처럼 그들 옆에 나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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