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슬리퍼가 메이지시대 초기의 국제외교 문제를 해결했다’는 제목의 신문칼럼이 있었습니다. 실내슬리퍼가 일본에 처음 생긴 에피소드를 소개한 내용입니다. 실내슬리퍼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메이지시대에 살던 일본인이라고 합니다. 서양나라들과 처음 교역이 시작되고 많은 서양인들이 일본을 방문하기 시작했을 때에 동서양의 문화차이 때문에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합니다. 갑자기 밀려들어온 서양인들의 구두 때문입니다.
그 시절엔 지금의 호텔은 없었고, 여행객들은 지금의 여관 같은 일본식 전통 료칸의 객실에 묵었습니다. 객실은 다다미가 깔려 있고 복도는 광택이 매끈한 나무 바닥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을 처음 찾는 서양인들이 구두를 신은채로 료칸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다다미는 표면이 부드럽고 속이 비어있어서 구두를 신고 다니면 금세 망가지게 됩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광택 나무바닥의 거실이나 복도도 충격에 약하기 때문에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관습대로 구두를 신고 실내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료칸주인의 설명에 여행객들은 난처해합니다. 그들은 샤워할 때와 잠을 잘 때 이외에는 신발을 벗은 맨발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것입니다.
결국 한 일본인이 고심 끝에 그때까지는 없었던 실내에서 신을 수 있는 신발을 만들었습니다. 실내슬리퍼입니다. 실내슬리퍼는 즉시 각 료칸에 보급되었습니다. 실내슬리퍼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다미가 망가지고 더러워져서 곤란한 료칸주인과 타인에게 맨발을 보일 수 없는 서양인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지혜로운 해결책입니다.
오랜 시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한 쌍의 한일부부가 있습니다. 부부는 가끔씩 한국과 일본의 다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국인들은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일본인들은 젓가락으로 밥을 먹습니다. 한국인남편에게 한국어른들은 밥공기를 밥상에 올려놓고 양반처럼 격식 있게 먹으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일본인아내는 사람이 짐승처럼 고개를 숙이고 먹으면 안 되니 항상 밥공기를 한 손에 들고 밥을 먹으라고 합니다.
밥공기를 밥상에 올려둔 채 숟가락이 아닌 젓가락으로 밥을 먹다보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친근함의 표시로 내 쪽에 있는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상대방에게 직접 건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것이 친근함의 표시가 아니라 심각한 결례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장례식 때 화장이 끝나면 고인의 남은 유골을 유가족들이 직접 옮기는데 그때 사용하는 것이 기다란 젓가락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듯 다른 이러한 문화차이를 한일부부는 날마다 만납니다. 둘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며 신앙을 통해 맞춰가고 있습니다. 몇 년을 두고 같이 살면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실내슬리퍼와 같은 공감대를 만들어갑니다. 한국인남편과 일본인아내는 료칸주인과 서양인처럼 지금 함께 실내슬리퍼를 신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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