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불과 열흘 전, 9월 중순까지도 한여름 같은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가을바람이 씽- 하고 불기 시작하니 무척 반갑다. 제2의 고향같은 캘리포니아를 떠나 뉴욕으로 이사하여 텃밭을 가꾸며 만종같은 낭만을 즐기려다가 유난스런 여름을 지나면서 꿈이 날아간 듯했었다. 거기다 코비드까지 다시 고개를 쳐들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곧 끝날 것이라던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사상자는 속출하고, 코앞에 대선을 둔 대통령 후보는 중도에 교체가 되는 희한한 정치권의 풍경까지 바라보며 웬 수난인가 했었다.
그러나 이제 시원한 가을바람과 함께 학생들은 학교로, 직장인들은 일터로, 한가위 추석을 잘 지낸 나 또한 마음을 가다듬고 제대로 가을을 느껴본다. 한여름이 타향이라면 가을은 고향이다. 타향에서는 공연히 들뜨고 객기를 부리다가도 고향에 돌아오면 사람들은 다시 차분해지고 정돈된 모습을 되찾기 마련이다. 개인이나 공동체나 그동안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잠시 일탈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모두 고향을 찾듯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귀향’의 설레임, 그건 환희다. 안정이다. 은총을 맛보는 따듯함과 포근함이다. 그러나 고향이 모든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기는 하지만, 고향으로 가는 길이 모두에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와서 평생을 이산가족으로 살면서 이제나 저제나 가족상봉과 남북 화해를 염원하다 끝내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분들도 많다. 또 불법체류자로 미국땅에 건너와 살면서 고향에 가보지 못한 딱한 이들도 많다.
귀향길에는 원래 뜻밖의 장애물이 많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게 많고 밟히는 게 많다보니 그런 분들이 많이 보인다. 20년 동안 타향에서 양을 치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고향으로 가게 된 야곱도 그의 앞에 에사우라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었다.
대학 연극부에서 공연했던 유진 오닐의 ‘긴 귀향 항로’도 야곱의 귀향과 닮은 데가 있다. 글렌케언 호의 선원 올슨에게는 오직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꿈에 가득했지만 술을 좋아하는 조와 창녀 프레다에 의해 그 꿈은 좌절되고 다시 긴 귀향항로는 계속된다.
고향을 찾는 마음은 어느 때보다 순정하고 너그러워져야 한다.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던 천성의 마음, 평화의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을은 축복의 계절이다.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 ‘구월이 오면’에서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의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이라고 가을을 노래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