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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루하루를!> 엄마목소리


오래전에 ‘그놈목소리’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를 본 일은 없으나 소름끼치는 제목으로 여러 번 광고가 나와서 섬뜩한 영화라는 걸 짐작했다. 자식을 유괴당한 엄마에게 전화벨을 타고 들려온 소름 돋는 ‘그놈목소리’. 아이 엄마는 죽어가고, 나또한 같은 엄마로서 엄마의 심정이 되어 ‘그놈’을 함께 욕하며 함께 울었었다.

목소리는 그 사람을 대신한다. 울음으로 말을 대신하던 아기 때 내 아들은 빽빽 울어제끼다가도 뱃속부터 엄마냄새를 익히고 나왔는지 내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 울음을 뚝 멈춘다. “엄마 왔어” 한마디 하면 목소리도 익숙한지 젖 먹을 태세로 입을 쭉 내밀고 오물거리며 대기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 나는 남편을 따라 이 나라 저 나라 선교지로 떠돌며 살면서 순간마다 때마다 한국에 계신 엄마가 그리워 울었다. 덥고 힘든 날엔 더욱 엄마가 보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늙으셨고 나는 미국으로 와서 남편의 학위공부 뒤치다꺼리로 더 바쁜 나날을 보내며 엄마가 아프신 데도 못가고 비싼 전화요금을 물며 자꾸 전화만 걸었다.

 

“어머니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고모도 잘 계시지요?” 교환수처럼 중간지기가 중간에서 기계적인 동문서답을 하며 가로막으면 나는 선교지 언어보다 더 알아먹지 못할 뚱딴지소리에 질려 가슴을 쳤다. 그러다 어쩌다 한번 수화기를 넘겨받은 엄마는 “엄마다ㅡ 전화요금 비쌀 텐데ㅡ” 전화요금 걱정, 자식걱정, 자식사랑으로 엄마목소리는 떨렸고, 나는 그 전화기 속으로 기어들어가 엄마를 만나고 싶어 떨었다.

얼마 후,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무슨 정신에 12시간 비행을 했는지 모른다. 복닥거리는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나는 엄마가 누워계신 안장실을 찾았다. 굳게 잠긴 쇳덩어리 철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엄마ㅡ”

 

엄마모습이 떠올랐다. 뜨끈하게 불에 구운 자갈돌들을 헝겊에 싸고 쌓아서 학교 가는 어린 딸의 주머니마다 넣어주시던 엄마. 나는 차가운 학교 마룻바닥에서 꽁꽁 얼어붙어 감각도 없는 발바닥에 엄마의 자갈돌을 대고 의자에 올라앉는다. 사르르 녹은 발에서 나는 엄마를 만난다. 발이 녹으면 마음도 따스해진다. 유달리 몸이 약하고 추위를 타던 나는 엄마의 자갈돌을 품고 따듯하고 의연하게 유년시절의 겨울을 보냈다.

“잘 다녀와. 몸조심 하고” 다 커서 수학여행을 떠나던 새벽, 대문 앞에서 엄마의 배웅을 받던 나는 3박4일간 엄마와 헤어지기가 싫어서 “엄마, 나 안갈까 봐”했었다. “얘들아, 우리 어린애 어디 있니?” 소풍날, 반장이라 앞에 서서 가는 자랑스런 딸을 찾는 행복한 엄마목소리. “엄마도 밥 안 먹었어, 어서 같이 먹자” “자, 영양국수 먹자. 간호사언니 숙소에 가서 끓여왔어” 병원이나 집이나 엄마의 사랑은 어디서든 차고 넘쳤다.

그런데 나는 엄마의 임종도 못 지킨 딸이었다. 손주까지 보고 할머니가 된 지금, 나는 어머니날이면 으레 카네이션 꽃 두 송이를 준비하여 정성껏 말리는 작업을 연중행사처럼 한다. 그러면서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과 긴긴 대화를 한다. 속이 후련하도록 한다. <원더풀라이프 발행인 박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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