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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성목사의 사람사는 이야기>“네 눈 속에 들보ㅡ”


은퇴를 하고나니 앞이 캄캄했다. 한 번 더 태국선교를 하리라 기도하던 터라 곧바로 자비량선교로 떠났다. 한국에서 신학교 강의도 하고 태국에 가서 선교도 하면서 7년의 세월을 보내고 70이 넘어서 진짜 은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더운 나라에서 먹는 것도 부실하고 돈고생을 하던 아내는 체중이 10파운드도 넘게 줄어 환자처럼 말랐고 엄마를 본 아들이 몹시 마음이 아픈지 울면서 내게 물었다.

왜 몸도 약한 엄마를 그 나이에 끌고 다니며 고생을 시키느냐는 것이다. “엄마는 한 번도 아빠가 하는 일에 반대하질 않았어. 엄마세대는 그런거야” 내 대답이었다. 순간, 아들과 며느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왜 부인을 보호하지 않느냐”고 따지듯 묻는데 나는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아들며느리가 나에게 대든 것도 처음이지만 무엇보다 아내는 나의 동역자지 한 번도 내가 보호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정신이 멍했다.

우리가 돌아오니 집이 비좁아서 내가 쓰던 책들을 모두 치우며 아들은 잔소리를 이어갔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되지 비싼 주석을 종류별로 사서 열어보지도 않고… 엄마만 고생시키고…” 굵은 눈물을 뚝뚝뚝뚝 떨어뜨리며 아들은 한탄인지 독백인지 나에 대한 원망을 계속했다. 아내가 고생한다는 생각은 했어도 그게 애절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나에게 아들의 눈물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사실 파트타임 한번 안하며 좋은 학교기숙사에서 좋은 자동차 타며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아내는 세 번씩 버스를 갈아타며 파사데나에서 LA를 오가며 오버타임을 하며, 남의 원고를 써주며 내 학부형노릇을 했다. 공부를 다 마친 후에도 내가 파트타임 정도의 적은 사례비를 받으며 가난한 신학교에 근무를 해서 아내의 고생은 은퇴나이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어머니께 생활비 송금을 하든, 집장만을 하든, 아들이 대학을 가고 장가를 가든 아내가 잘 하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아들의 폭풍눈물에 가슴이 떨리고 양심이 후덜덜 거렸다. 평생 개념 없이 산 것 같아 괴로웠다. 아내에게 눈물로 사과를 했다. 등록금 한번 내준 적이 없는데 결혼하고 아이들을 셋이나 낳아 기르고 있는 아들을 보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내는 원망도, 한숨도, 눈물도 그 어떤 반응 없이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 유달리 정이 많고 마음도 약한 소녀감성을 가진 아내가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애교나 재잘대는 모습을 본지가 언젠지도 모르겠다. 늘 흘려듣고 말았는데 아내는 “당신은 배려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최근 자주 했었다. 뼈있는 말이었다. “기대고 싶다”고도 했었다. 남편을 의지하고 보호받고 싶다는 말이었는데 신경이 무딘 건지, 태생이 그런 건지 나는 그마저 무심코 넘겼다.

출산하러 병원을 가는 만삭의 아내를 눈 오는 빙판길에 혼자 보내놓고 밤늦게 딱딱한 땅콩을 사들고 간 나같은 남편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아들의 추억속에 아빠와 공차기를 하며 놀던 게 한번밖에 없다니 세상 어디에 이런 아빠가 있을까? 이사한 집을 몰라 퇴근을 못했고, 아들결혼식을 한국에 나가서 하게 되었는데 학교일이 바빠서 안가고 싶다고 했던 나다.

도대체 왜 그러고 살았을까? 주의 종은 세상일을 하면 안 된다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아내가 항상 좋은 것으로 챙겨주는 바람에 안주해 버렸었나? 정말로 남편이나 아버지의 역할을 보고 배우질 못해서 그랬을까? 사랑이 결려된 건가? 목사로 교수로 죽자코 뛰어다닌들 주께서 잘했다하셨을까? 머리가 아파왔다.

“네 눈 속에 들보ㅡ” 그때 주께서 알려주셨다. 정답이었다. 나만 아는 들보ㅡ 아내가 덮어준 들보ㅡ 그 해결은 순전히 내가 풀어야할 내 몫이다. 가슴 참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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