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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being으로 살기> 한국여행일지


 

동생이 하늘나라로 떠난 후, 나는 서울이 텅 빈 것처럼 서럽고 싫어서 한동안 한국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오빠의 치매기 소식을 듣고는 오빠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어 10년만에 한국행에 올랐다. 그런데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에 조카 쪼잉이가 불쑥 명함 한 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들 쭌이가 미국할머니에게 전해달라며 준 명함이라 했다.

순간, 그 명함이 어릴적 쪼잉이의 증명사진과 겹쳐보였다. 가뜩이나 눈물이 쏟아지는데 뺨 때려준 격으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가족과 함께 태국선교지로 떠나던 날도 당시 초등학생이던 쪼잉이가 지금처럼 불쑥 조그마한 증명사진 하나를 내밀었었다. 바싹 마른 얼굴, 커단 눈, 쪼잉이의 조그마한 증명사진은 그후 줄곧 나를 따라다니며 울렸었다.

그런데 요번에도 쭌이의 명함과 클로즈업된 쪼잉이의 그 증명사진이 미국으로 돌아와 원고를 쓰고 있는 나를 쫓아다니며 울려댔다. 이젠 장성한 두 아들과 중후한 남편이 지켜주는 걸 보고 왔어도 여전히 나는 엄마 없이 가엾게 자란 어린 쪼잉이로 내 마음속 딸로 품고 있었다.


KTX가 생소한 나는 강릉언니를 보러가면서 굳이 고속터미널에서 강릉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싶었다. 가면서 휴게실마다 들러 우동도 먹고 튀긴 감자랑 돌에 구운 오징어를 뜯고 싶었다. 그런데 만인의 만류와 함께 ‘꼰대’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순한 양이 되기로 하고 쫑숙의 손을 잡고 KTX를 타러 서울역으로 갔다.

옛날 시계탑의 낭만은 그림자도 없고, 공항대합실처럼 으리삐까하여 약간 겁이 났다. 그런데 나처럼 떡볶이와 순대, 떡과 한과까지 즐겨먹는다는 관광객들이 곳곳에 웅기종기 둘러선 모습이 놀랍고 좋았다. 기념품은 K뷰티, 놀이문화도 한국인처럼 한다니 고맙기까지 했다.

때마침 그들 틈을 파고 들어가 쫑숙이가 잽싸게 오뎅국 한 컵을 사주는 바람에 나는 홀딱 넘어가 들뜬 기분으로 ‘좋은 여행’이라고 머리에 입력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역시 피는 진하고 핏줄의 만남과 헤어짐은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아픔이다. 혼자된 큰조카, 만날 수조차 없이 아픈 친구들도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가슴을 눌러댔다. 갑자기 동생이 있고 엄마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로 가고 싶어졌다. 오빠를 만났으니 할일도 다 했다고 생각했다.

미국으로 향하는 기계에 몸을 싣고 하얀구름 위를 달리는데, 흰구름 둘레를 싸고 있는 찬란한 은빛 띠들이 너무나 가까이 보였다. 저 태양빛너머 하늘나라에 보고 싶은 동생이 있을 것 같아 가슴이 울렁거렸다. 얼른 이석증약을 한 알 삼켰다. 다리가 부었는지 뻥 터질 듯 아파왔다. 발을 의자에 올렸다내렸다 무식하게 굴어도 기내의 타인들은 누구하나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제 비행기도 끝이고 서울도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쳤다. 정자세로 예를 갖춰 앉아 비행기에 인사를 했다. “그동안 수십 번 태워줘서 고맙다” “이제 안녕!” 나는 숙연하고 진지한 마음속 작별인사를 비행기와 나눴다. <원더풀라이프 발행인 박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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