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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섭의 콩트세계> 봄꽃


가희는 걷고 또 걷는다. 친구 라후와 만나기로 한 라미라다공원에서 호수를 끼고 옆으로 잘 만들어진 산책로를 운동 삼아 걷는 중이다. 잔물결을 일으키며 헤엄치는 오리떼를 보는 것도 이곳의 자랑이다. 그런데 방금 꽥꽥 노래하던 연못속 오리 한 놈이 물속에 코를 박고 꼬랑지를 하늘로 치켜들고 거꾸로 죽은 듯 박혀있다. 웃기고 아슬아슬해 가희의 눈은 거기에 꽂혔다. 그 둘레를 빙글빙글 배회하던 놈은 누굴까?

수놈인가? 그런데 왜 갑자기 날갯죽지를 펴고 후드득 가버렸을까? 닭 쫒던 개 하늘 쳐다본 꼴인가? 저것들도 싸움을 하나? 아주 치열하군. 누가 배신을 한 걸까? 코를 박고 숨은 놈? 따라가다 도망간 놈? 사랑싸움일까? 생존을 위한 먹이싸움일까? 가희는 머릿속이 빙글거렸다.

얼른 라후가 왔으면 좋겠다. 가희는 라후가 오는 잔디쪽으로 걸어가다가 잔디사이로 들꽃이 삐죽삐죽 올라오는 걸 보았다. “어머나 어머 예뻐”라 외치며 눈을 들어 살펴보니 크고 높다란 나무들이 통째로 꽃을 피워 꽃나무를 이루고 있었다. 핑크색, 보라색, 자주색, 갖가지색의 화려한 꽃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파킹장과 잔디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아름다운 봄처녀들이 몰려 왔을까. 가희는 그 모습들에서 무한한 생명력을 느낀다. 어느새 마음속 어두움이 가시고 꽃미소가 터졌다. 곧 만날 라후 생각에 가슴까지 따듯해졌다. 언제나 의지가 되는 친구, 라후는 어려서부터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발딱 다시 일어나 환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것은 모태신앙으로 깊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가희는 너무도 잘 안다.

사실 그래서 선뜻 그를 믿고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따라나선 가희다. 그후 중도에 공부를 포기해 힘들 때도, 약혼자와 헤어져 우울증에 걸렸을 때도, 가희는 라후를 의지하고 일어섰다. 오늘은 그 좋은 친구, 라후를 만나 여행을 떠나서 1박을 보내기로 한 날이라 더욱 기대되는 날이다. 걸리적거리던 모든 짐 다 내려놓고 어디론가 마음 가는대로 무조건 훌쩍 떠나기로 한 날이다.

우리는 차 창문을 활짝 열고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달릴 것이고, 고국의 그리운 부모형제 생각이 나면 펑펑 눈물을 쏟을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꽃을 만나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 찬양을 목청껏 부를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마음껏 즐길 것이다. 가희는 어느새 절망과 상처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이미 마음으로 라후와 봄나들이를 떠나고 있다. 역시 희망 가득한 봄처녀, 봄청춘들이다.

드디어 파킹장쪽에서 가희를 향해 두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라후가 보인다. 때마침 살랑거리며 봄바람이 불어서인지 꽃나무에서 꽃잎들이 흩날리며 떨어진다. 그 꽃잎을 손으로 받는 시늉을 하며 달려오는 라후의 모습은 영락없는 한 폭의 그림이고 또 하나의 봄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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